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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치유가 필요한 당신에게, 스핏파이어 그릴

The Spitfire Grill, 1996

1996년, 선댄스 영화제 관객상 수상

스핏파이어 그릴은 1996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독립 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1980~1990년대까지 리처드 딘 앤더슨이 주연을 맡은 미국 TV 드라마, 국내에선 맨손의 마법사로 불리던 추억의 인기 드라마 맥가이버의 감독 리 데이비드 즐로토프가 각본과 감독을 맡았다.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20년도 훨씬 전이다. 당시 흥행했던 영화도 아니었고,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이 영화를 선택했던 이유는 포스터 속의 여배우의 모습이 눈길이 갔고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서였다. 당시 SF나 스릴러 장르의 영화들을 즐겨보던 내게도 힐링이 필요했던 걸까? 어디서 본 건지 들은 건지 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떠나고 싶을 때가 있나요, 그러면서도 머물고 싶지는 않았나요'라는 이 영화와 관련된 멘트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치유의 땅 길리아드에서 새로운 시작

교도소에서 5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는 주인공 퍼시. 그녀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시골의 작은 마을 길리아드로 향하고 감옥 보호관에게 소개받은 마을 보안관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가 정착할 곳, 한나가 운영하는 스핏파이어 그릴이라는 작은 식당으로 데리고 간다. 스핏파이어는 영국 전투기 이름이라고 한다. 아마도 한나의 남편과 아들이 전쟁에 참전했던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퍼시는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외부에서 온 그녀를 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퍼시는 감옥에서 출소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한다. 사실 그녀가 감옥에 간 이유는 계부로부터 나쁜일을 당하고 임신을 하지만 결국 아이를 잃고 계부를 죽인다. 이유는 충분했지만 지금 현실에서도 그렇듯이 법은 대체 누구의 편인가? 피해자는 결국 가해자가 되어 더 큰 고통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독 퍼시를 못마땅해하는 한나의 조카 나훔이 있다. 그녀에게 호의를 보이는 조라는 남자도 있다. 하지만 호기심거리로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그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차후 둘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조는 퍼시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만 퍼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퍼시의 상처는 쉽게 아무는 것이 아님을 한번 더 확인하게 되는 장면이다. 둘이 잘되길 바랬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느 날, 한나는 의자에 올라갔다가 발을 잘못 디뎌 다리를 다친다. 나훔은 퍼시의 탓을 하며 내쫓려고 하지만 한나는 받아들이지 않고 퍼시에게 식당을 맡긴다. 하지만 퍼시의 요리 실력은 엉망이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손님들의 몫이었다. 다행히 나훔의 부인 셸비의 도움으로 고비를 넘기고 식당은 안정을 되찾는다. 어느 날 퍼시는 셸비에게 한나의 사연을 듣게 된다. 한나에게는 아들 일라이가 있다. 전쟁이 일어났고 아들은 자원을 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한나는 식당을 팔려고 내놓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팔지 못했다고 한다. 실은 아들 일라이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로 홀로 산속에서 살고 있다. 한나가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음식을 장작 옆에 놓아두는 것뿐이었다. 다리를 다친 한나의 부탁으로 퍼시는 일을 대신해주기로 한다. 퍼시는 셸비와 함께 한나와 아들을 돕기 위해 교도소에 있었을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에세이 콘테스트를 열어 참가비로 현금 100불과 함께 스핏파이어 그릴을 운영해야 하는 이유를 주제로 사연을 받아 모인 참가비는 한나에게 주고 1등에 당첨되는 사람에게는 식당을 물려주자는 아이디어였다. 교도소에 있는 친구들에게 홍보를 부탁하고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 시작하며 생각보다 많은 돈이 모이고 마을까지도 활기를 찾기 시작한다.

일라이를 만나 치유받는 퍼시

퍼시는 일라이 찾으러 산으로 올라간다. 어딘가에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한 퍼시는 일라이에게 자니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둘만의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니비는 퍼시가 임신했던 아이의 이름이다. 산속을 헤매던 그녀는 계곡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다. 멀리서 일라이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일라이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 순간이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을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날 이후 아침, 퍼시는 방 창가에는 나뭇잎으로 만든 새의 모형이 놓여 있다. 일라이 임을 눈치챈 퍼시는 다시 그를 찾으러 산으로 올라간다. 마침내 퍼시는 일라이가 사고 있는 집을 발견하고 그의 소리를 따라간다. 그녀는 아름다운 들판에 도착하고 그곳에 앉아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뒤에서 일라이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와 머리를 만져준다.

에세이 콘테스트가 끝나갈 무렵, 그때까지도 퍼시를 탐탁지 않게 보던 나훔은 한나가 금고에 모아둔 참가비를 훔쳐 자루에 담는다. 퍼시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자루를 내려놓고 숨어 버린다. 아무것도 모른 채 퍼시는 평소처럼 자루에 음식을 넣어 밖으로 나간다. 결국 마을에는 퍼시가 한나의 돈을 훔쳐 공범한테 전해주었다는 소문이 돈다. 한나의 아들이 공범으로 몰리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범인을 잡으러 산으로 올라간다. 퍼시는 한나의 부탁으로 위험을 알리려고 일라이를 찾으러 산으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물에 빠지게 되고 일라이는 그녀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지만 결국 퍼시는 죽음을 맞이한다.

퍼시의 장례식,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추모하고 나훔은 죄책감을 느끼며 모든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한다. 퍼시가 없는 텅 빈 방, 그리고 식당에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한나의 아들 일라이가 앉아있다. 한나는 나이가 들어버린 아들을 바라보며 손을 잡는다. 얼마 후, 마을에는 잔치가 벌어지고 콘테스트에 당첨된 젊은 여성이 어린아이를 업고 부푼 기대와 희망을 안고 마을을 찾아온다. 이전과는 달리 마을 사람들은 그녀와 아이를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치유가 필요한 당신을 위한 추천 영화

스핏파이어 그릴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열고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나간다. 우리는 가족, 또는 타인으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한다. 때론 온갖 편견들로 가득 차 나조차도 자유롭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 또한 사람이다. 영화 후반부 즈음,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나온다. 일라이를 찾아 숲을 헤매던 퍼시가 언덕에 올랐을 때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이때 일라이가 나타나 살며시 퍼시의 머리에 손을 얹는 장면은 마치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일을 연상하게 한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기에 깊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상처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어느새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었다. 이게 영화의 힘인가 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난 그곳에서 그녀들과 함께 있었다. 지금 혹시라도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조용히 혼자 이 영화를 보기를 추천한다. 어쩌면 주인공 퍼시처럼, 아직도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은 나처럼 잠시라도 당신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