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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윤희에게, 잘 지내니? 나도 니 꿈을 꿔

Moonlit Winter, 2019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다.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윤희는 늘 마음이 텅 빈 사람처럼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윤희는 남편 인호와 이혼을 하고 딸 새봄이와 단둘이 살고 있다. 전 남편의 직업은 경찰이다. 그는 술만 먹으면 윤희를 찾아오고 그녀는 짜증을 내며 제발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 어느 날 남편은 윤희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청첩장을 건네며 서글프게 운다. 남편은 아직도 윤희에게 애틋한 감정이 남아있는 것 같다. 엄마와는 다르게 밝고 활발한 성격의 딸 새봄이는 곧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고, 엄마가 선물로 준 필름 카메라를 항상 들고 다닌다. 새봄이는 항상 사진을 찍는데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고 하면서 사람은 찍지 않는다. 그리고 곁에는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 친구 경수가 있다.

극 중에서 아빠, 엄마, 딸 새봄이 와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 각자가 숨기고 살아왔을 감정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윤희는 아빠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었다. 새봄이는 엄마 아빠가 이혼했을 때 엄마와 살았던 이유는 엄마가 혼자 못살 것 같았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새봄이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늘 위태로워 보이는 엄마를 보며 엄마에게 자신은 짐이 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윤희 앞으로 일본에서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새봄이는 엄마 몰래 편지를 뜯어본다. 편지의 발신인은 쥰 가타세. 쥰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윤희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년 전, 윤희와 쥰은 학창 시절에 만나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다.
윤희는 가족들에게 쥰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가족들에게 부정당하고 정신병원에 보내진다. 병원을 나온 후, 친오빠가 소개해 준 남자와 결혼을 하지만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고 결국 이혼을 하고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고 만다. 마지막에 윤희가 쥰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쥰아, 나는 나한테 주어진 여분의 삶이 벌이라고 생각했어. 그녀가 왜 그토록 삶을 포기한 듯 자신을 가두며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쥰은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자신에게 무심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오게 된다. 모두에게 무관심한 채 차라리 혼자인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금은 고모(마사코)와 함께 살고 있다. 한 번은 쥰에게 호감을 보이는 어떤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언가를 숨기고 살았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기세요. 그렇게 쥰은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한 채 마음을 꽁꽁 숨기며 윤희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매번 붙이지도 못할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극 중에서 고모는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라는 말을 버릇처럼 한다. 이 말은 쥰의 길고 긴 그리움과 외로움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윤희에게 보내진 편지도 그런 쥰을 위해 고모가 대신 붙여준 것이다. 윤희와 쥰은 그렇게 가슴 아픈 사랑을 마음속 깊이 숨겨둔 채 서로를 그리워하며 각자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첫사랑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

새봄이는 엄마에게 편지의 내용을 숨긴 채 여행을 제안하고 편지가 온 일본 오타루로 여행을 떠난다. 남자 친구 경수도 몰래 따라와 둘은 엄마의 첫사랑을 찾기 위해 조사를 하고, 염탐을 하기도 하고, 만남을 성사시키려 고군분투한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하루는 택시를 타고 쥰의 집 앞까지 찾아간 윤희, 쥰을 보고도 차마 아는 척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소리를 애써 참으며 눈물을 흘린다.

일본 여행의 마지막 날, 새봄이는 엄마와 쥰을 우연히 만나게 하기 위해 저녁을 같이 먹자며 오타루 운하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달빛이 환하게 비추던 밤, 쥰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고 그 뒤로 윤희가 나타난다. 2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한 번에 서로를 알아본다. "윤희니?" 이 한마디로 그동안 쌓아두었던 마음의 벽이 모두 무너져 내리고 윤희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힌다. 그 길고 긴 시간의 그리움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오타루에 쌓인 눈과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때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깊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윤희는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던 세상으로 다시 나아가 새로운 출발을 결심한다. 그리고 윤희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다. 딸 새롬이는 그런 아름다운 엄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윤희는 이제 더이상 자신이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며 쥰에게 편지를 쓴다.

다시 새로운 시작

윤희에게는 퀴어 영화지만 관객들을 어색하게 만드는 장면은 전혀 없다. 윤희와 쥰이 사랑한 이후의 마음들에 포커스를 두었다. 동성이냐 이성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에게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꼭 첫사랑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 어떤 사람들은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후자였던 윤희와 쥰. 다행히도 새봄이와 고모가 두 사람을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해주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고모의 말은 미래가 되어 눈은 그칠 것이고, 딸의 이름처럼 새로운 봄을 안겨 줄 것이다. 윤희와 쥰, 두 사람이 본래 자신들의 모습을 찾아가길 바라며, 누군가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